★ <대한민국 욕망 보고서> 신승철 지음
사실 현대의 가족은 무의식이 고아인 아이들이 만든 공동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부모의 일방적인 욕망투여로 아이들의 욕망이 규정당하고 억압당할 때 오이디푸스적 가족신경증이 생겨나며,
이로 인해 아이들은 예속된 욕망상태에 빠지게 된다.
- <안티 오이디푸스> 中
- '무의식이 고아' = 자기 내면(감정, 욕망)이 돌봄 없이 방치된 상태
- '욕망 투여' = 부모가 자기 욕망을 아이에게 억지로 심는 것
- '오이디푸스적 가족신경증' = 부모가 자신의 욕망이나 좌절을 아이에게 무의식적으로 떠넘기면서, 아이의 독자적 욕망이 억압되고 부모 욕망을 내면화하게 되는 심리적 구조.
- 자기 욕망을 인식하거나 선택하는 능력이 손상됨 → 예속된 인생, 무기력, 심리적 공허함
그 뒤에 들뢰즈와 가타리는 무의식이 고아인 아이들을 분열자라고 규정하는데,
이것은 정신분열증에 걸린 사람들이 가족무의식으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것에서 착목한 개념이다.
오이디푸스의 문제는 가족재생산 및 사회재생산 문제와 긴밀한 관계가 있다.
이 오이디푸스를 넘어서는 것은 자본주의 재생산의 논리보부터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는 의미를 가진다.
- <안티 오이디푸스> 中
- 오이디푸스를 넘어선다
- → 가족이 정해준 삶 &
- → 사회-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욕망조차 넘어서
- → 진짜 자기만의 욕망과 삶을 찾는 것
*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
1) 미술치료 수업 시간에 배운 내용을 적용해볼 수 있겠다. 타인과 나의 목소리 분리하는 작업
2) 내가 2년간 노력한 것. 순간의 나를 관찰하고 기록하기. 무엇에 내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긴장? 몰입? 편안? 불안?)
사교육은 아이들에게 차별과 위계 없는 평등한 세상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동료들과 경쟁해야 하는 아수라장 속에서 기회주의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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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지니고 있는 사랑과 우정, 모험심과 호기심, 동정과 존엄 등의 가치들은 자본주의에 의해서 식민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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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성공한 부르주아가 자신의 계급을 재생산하는 절차에 불과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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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계급으로 존재하는 것은 계급의 논리에 자신의 삶과 욕망을 맡기고 개인의 욕망이나 삶의 가치를 모두 다 헌납해야 가능하다. 결과적으로 사교육시장과 연루되면서 부모들이 부르주아계급이 되기를 욕망하는 것은 곧 아이들에게 부르주아 계급의 논리대로 움직일 것을 명령하는 것으로 뒤바뀐다.
* 서민가족도 부르주아의 풍토에 합류해 사교육열풍이 분 것은 사실이다.
이들은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욕망 뿐 아니라, 가난, 차별의 두려움으로 사교육을 선택한 건 아닐지?
1970년대에 철야산업에 지친 여공들이 있었다면,
2000년대에는 사교육시장에서 공부하면서 뜬눈으로 새벽을 지킨 아이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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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것은, 자본주의적 욕망에 편입되지 않고 그 외부에서
예술의 욕망, 과학의 욕망, 창조와 생산의 욕망을 목표로 하는 대안교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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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화된 사회적 배치는 창의적이고 대안적인 인간관계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욕망이 만든 물신화된 인간관계를 만들어낸다.
미래세대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위한다면 "돈이 해결해 주겠지"라는 생각에서 먼저 벗어나야 한다.
* 빈곤도 인간의 자유와 창의성을 제약한다. 우리의 현실이 자본주의이고, 이 시스템에서 살아남으려면 돈이 필요하다. 그럴려면 현실이 요구하는 역량을 갖춰야 한다. 대안교육 후에 결국 현실로 나와야 하는데, 현실적 생존 전략을 준비하지 않는다면 또 다른 형태의 좌절을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대안교육이 예술, 과학, 창조와 생산을 목표로 하는 것 뿐 아니라, 자본주의 안에서 스스로를 지키고 선택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교육이 되는게 필수적이라 생각된다.
부모들이 사교육열풍에 휩싸이는 이유 중 하나는
자신이 겪고 있는 불안정한 현실과는 다른 안정된 현실을 아이들에게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절실함 때문이다.
* 나의 경우 외부 기준으로 안정감을 얻으려하니, 결국 끝없는 의존과 불안을 낳았다.
현재-여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연습, 자기 자신과의 연결로 중신을 잃지 않는 것이 훈련되는 게 중요하다 생각된다.
오이디푸스 삼각형- 부모들이 자신의 욕망을 아이들에게 덮어씌우려고 할때 시작된다
아름다운 공동체가 아닌 자본주의 기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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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적 가족제도를 꿈꾸는..
아이를 독립적인 인격체로 보고 아이의 말에 귀 기울이며
아이의 욕망과 창의성과 생산성과 함께 호흡하는 삶의 방식의 색다른 관계맺음은
대안이 매우 가까이에서 시작되는 것을 의미한다.
나도 무의식이 고아였다. 2년간 일기를 쓰면서 나의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나의 얘기인지 외부의 얘기인지 구분하기 시작했다.
정말 죽을만큼 힘들었기 때문에 시작된 일이였다.
나는 평범한 아이였다. 초중고대학 그리고 회사. 사회가 정해놓은 길을 반듯반듯 잘 걸어왔다.
그런데 마음 한쪽이 공허했다. 이 삶을 살아서 무엇을 하나 생각했다.
퇴사를 하고 내 마음을 채울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찾아다녔다.
그 중 하나가 미술이었다. 곧잘하는 나를 보고, 함께 수강하는 어르신께서 "그간 미술을 많이 사랑했었나보네."라고 말씀하셨다.
사실 나는 예체능을 하고 싶었다. 어릴때는 무용이, 커서는 미술이 하고 싶었다. 무용을 하고 싶다했을 때 집에 돈이 없다 그리고 할 만큼 너가 재능이 있지는 않다고 이야기를 들었고, 그래서 미술도 크게 말씀드리지 않고 지나갔다.
사교육의 무한 굴레를 거치고, 나는 대학을 선택할 때 내 멋대로 '의류디자인'을 선택했다.
모든 서류를 의류디자인으로만 했다. 생각해보니 나의 욕구와 분노를 표현했던 것 같다.
우리 엄마는 집에서 그림을 그리는 나를 보며, 어릴때 시켜줄걸 하셨다.
어릴때 나는 엄마아빠가 항상 돈이 들 것 같으면 회피하셨다.
좋아 보이는 옷도, 맛있어 보이는 것도 그저 한번 얼마인지 확인도 하지 않으시고 그저 지나쳤다.
고민이 된다. 내가 만약 아이가 생긴다면, 모든걸 해줄 수 없다. (물론 그것이 좋지 않다)
이때 어떻게 아이와 함께 호흡하며 대화해야 할까?
지나간 나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니,
미래의 아이에게는 아이의 마음을 인정해주고, 다른 대안을 함께 찾아주고, 욕망을 조율할 수 있게 도와주고 싶다.
과거의 나에게,
"윤희야, 너가 발레를 배우고 싶어하는 마음 엄마는 정말 멋있게 느껴진다.
몸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일이잖니. 다만 지금 우리는 큰 돈이 필요한 활동은 어려워.
하고 싶은 걸 바로 못해서, 기다리거나 다른 것으로 승화하는 것도 삶의 일부란다.
그렇지만 너의 그 용기, 그리고 몸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를 없애해야는게 아니야.
우리 같이 다른 방법이 있을지 찾아볼까? 우리 상황에서 너의 욕구를 지켜가면서 이어갈 수 있는 길을 같이 찾아보자."
그리고, 발레라는 특정 행위에 국한하지 않고
몸을 통한 표현으로 더 넓게 해석해서 요가, 뮤지컬 동아리, 스트릿댄스 등등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며, 아이와 함께 다른 방향을 탐구하는 든든한 엄마가 되고 싶다. 모든 걸 줄 수는 없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