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맑고 쾌청한 하루,
어르신 자서전 쓰기 봉사에 다녀왔다.
최근 1년간 가족 간의 관계 회복을 노력하며
엄마아빠 세대를 넘어서, 노인 분들의 심리 치유로 관심이 확장되었다.
어릴 때 사람은 꼭 책과 같다고 생각하며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면 어떤 이야기가 나올지 흥미진진했다.
어르신을 뵐 때면,
두꺼운 두께와 단단한 겉표지에 세월의 손길이 묻은 책이 떠오르곤 했다.
노인 분들의 심리 치유에 대해 알아보니
책과 같은 우리네 이야기를 인터뷰하여
'자서전을 쓰는 활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봉사 기간이 4월에서 11월까지로 장기 프로젝트였지만
한 사람이 켜켜이 쌓아온 세월을 직접 인터뷰하고, 집필하며
살아있는 역사를 공감할 수 있는 값진 시간이라 여겨져 바로 신청했다.
그리고, 이 경험을 통해
언젠간 우리 어머니 아버지도 자서전을 남겨드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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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이 적힌 명찰을 차고 강당 안으로 들어갔다.
미리 와계신 분들과 인사를 나눴다.
우리 조의 어르신은 안계셨다.
알고보니, 깜빡하셔서 멀리 어디 가셨다가 돌아오는 길이시라고 한다. ㅎㅎ
15분쯤 지났을까 어르신이 도착하셨다.
소녀처럼 웃으시는 모습에서
시간이 만든 단단함과 깊은 따뜻함이 함께 느껴졌다.
어르신의 자존감 및 만족도 척도 검사를 도와드렸다.
* 잘 보이지 않아서, 종이에 써 있는 문장을 읽어드리고, 답을 하시면 직접 체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 부분은 탭을 이용해서 큰 글씨로 척도검사를 제공하여 직접 체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겨졌다.
질문을 하면서 본래 의도와 달리 뉘앙스가 바뀌는 경우가 있었고,
또 어르신께서 모른다/노력한다 등 애매한 답이 나오는 경우 봉사자의 판단이 섞여 응답 체크하는 케이스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후 서로 눈 코 입 등 하나씩 그림을 그려 얼굴을 완성하는 것과
간단한 질문에 대한 답을 하여 자신을 소개하는 활동을 했다.
내가 가장 아끼는 것은? 질문에
어르신께서 사람은 다 사랑이지~ 말씀하신다. 그럼 가족이라고 할까요? 하니
그럼 나누는 것 같잖아~ 다 예쁜데~ 하시더니, 주변사람들이라고 적으셨다.
가족이라고 쓴 나는, 마음을 더 넓게 써야겠다 생각이 들었다.
한 자원 봉사자께서는
나를 신나고 행복하게 하는 것은? 이라는 질문에 '오늘'이라 답하셨다.
매일을 신나게 행복하게 사신다니,
무엇이 있기 때문에 행복한게 아니라, 그저 하루가 나에게 주어졌기에 행복한 것이였다.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게 되었다.
소녀 같으신 어르신과 따뜻한 마음을 가진 봉사자분들과의 시간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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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는 아니지만,
참여하신 봉사자분들 중 기억에 남는 분들이 계시다.
한분은 시나리오를 쓰시는 분인데 어르신에 대한 이해로 글에 도움을 얻고자 오셨다고 한다.
또 한분은 영양사이셨다. 아동 대상에서 어르신 대상으로 담당이 변경되어, 어르신에 대해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오셨다고 한다.
또 한분은 키워주신 할머니가 그리워 오셨다. 고향이 멀고, 사는게 바빠 이렇게라도 할머니의 품을 느끼시려 하나보다.
삶을 개척해나가시는 모습이 참 멋있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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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께서 본인의 이야기를 해주셨다.
6·25 전쟁 때 겪은 가족의 아픔을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마음이 아리다.
어르신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연스레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전쟁 후, 집집마다 포로를 보내 먹이게 했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세명의 포로가 있었다는 말씀을 하셨었다.
난, 이제야 체감했다.
달달 외우기만 했던 역사가 어떻게 살아있는지를.
이제야 체감했다. 일제강점기, 6·25 전쟁, 민주화, 산업화를 겪는 각각의 세대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걸.
이 작은 나라에, 이 짧은 시간에, 어떻게 이 많은 아픔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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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줄곧 못배웠다는 말씀을 하셨다. 마음이 괴롭다.
그래도 자식들은 다 가르쳐서 좋다하셨다. 마음이 아프다.
우리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도 누군 가르치고 누군 가르치지 못해 마음이 아프다는 말씀을 아직도 하신다.
그리고 우리 어머니도 배우지 못한 한이 있다.
나는 그 한으로 대학을 나왔다. 우리 세대 모두가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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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정상 가족>이라는 웹툰을 접했다. 웹툰에 나온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평범, 중간, 정상 범주를 요구한다.
어릴 때, "평범한게 제일 어려워"라는 말씀을 하신 기억이 난다.
오늘도, "너무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아요. 중간이지. 잘됐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궁금했다. 나의 윗세대, 윗윗세대에게 평범은 무슨 의미일까?
그런데 조금 알 것 같다. 나는 겪어보지 못한 전쟁, 급격한 산업화...
그 격변의 시대 속에서 끝까지 버티고, 살아낸 것 자체가 얼마나 치열한 일이었을까.
평범이라 말씀하시지만, 그건 큰 성공이었다.
그리고 가족을 따뜻하게 품을 수 있는 안정과 평안이었다.
그 사람의 신발을 신고 오래 걸어보기 전까지는
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
-인디언 속담